바람 소식지10호 - 2021년 10월
> 활동가의 편지
나는 존엄한 화해를 원한다
가해자에게 동화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10월 마지막 한주를 잠을 못자면서 보냈다. 도저히 화가 나고 괴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1212군사쿠데타의 주범이자 518광주학살의 핵심책임자였던 노태우 씨를 국가장을 치르겠다고 결정해서다. 국가장은 장례를 국민의 세금으로 치를 뿐 아니라 조기를 달고 대통령이 상주로 있으면서 공식적인 애도를 하는 것이다. 국가장 결정으로 피해자들은 국가장이 열리는 내내 노태우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슬퍼하고 그의 공을 치하하는 행사를 접해야 했다. 518학살 피해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자들은 얼마나 잠 못 이뤘을까. 얼마나 한스럽고 억울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은 부끄럽게도 학살자를 추모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추가했다.
노씨는 1979년 12월 12일 하나회 멤버로서 전두환 씨와 함께 탱크를 몰고 청와대를 들어가 군사쿠데타로 헌법을 유린한 사람이다. 충분하지 않지만 쿠데타에 대해서는 벌을 받았다. 처벌받았다고 국가장이라는 예우를 받을 대상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는 80년 광주학살 당시 수도경비 사령관으로서 광주에 있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학살한 주요 책임자다. 실제 노씨는 광주학살을 위해 서울에 있던 보병20사단을 광주로 내려가라며 지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권력서열 1위(전두환)가 아닌 2위라고 학살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독일 나치 전범 중 재판 받는 사람 중에는 권력서열 1위만이 아니라 비서관이나 강제수용소 경비도 있다. 너무나 대조적이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다르다는 논리는 비상식적이고 반인권적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전쟁범죄자 같은 중대한 국가범죄자들이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는 문제(불처벌)와 싸우며 세운 인권원칙이 있다. 국가정 결정은 이와 거리가 멀다. 유엔인권위의 논의를 시작으로 91년 <인권침해 가해자 불처벌에 대한 저지투쟁을 통한 인권보호 원칙>이 만들어졌고, 96년 유엔인권특별보고관은 인권소위원회와 유엔 총회에 제출한 <인권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불처벌 문제>라는 제목의 최종 보고서에 담겼다. 중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대개 정치권력과 폭력, 재력을 독점하고 처벌을 피하고 있다며, 불처벌이 생명권 침해의 주원인이며 생명권 침해를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2005년 피해자의 권리에도 반영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왜 피해자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노력하지 않는가.
피해자가 아닌 국가가 학살자에게 ‘용서와 화해’라는 면죄부를 줄 수 있는가
김부겸 총리는 10월 30일 장례식에서 노태우 씨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88올림픽 개최나 토지공개념 같은 공적이 있다는 조사를 낭독했다. 나는 묻고 싶다. 어떤 살인자가 그가 세운 공 때문에 치하받는 경우가 있는지. 사실 88올림픽 개최는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 시대 시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산업)의 연장선이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이 산업자유화의 흐름에서 세운 정책이므로 특별히 치하할 것이 못 된다. 더 큰 문제는 88올림픽 개최를 핑계로 빈민들을 쫓아낸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김총리는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88올림픽 개최의 이면은 애써 감췄다. 80년대 군부정부는 많은 재정을 3S 부흥에 힘을 들였을 뿐 아니라 부당한 정권 획득으로 인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치적 쌓기용‘ 정책도 많이 세웠다. 국제인권규약에 많이 비준한 때도 90년대다.
나는 기억한다. 수많은 빈민들의 절규와 투쟁을. 그리고 또 나는 기억한다. 노태우의 대통령 재임기간 죽어간 수많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열사들도. 91년 전경들에게 맞아 죽은 강경대 열사, 전경들의 강제진압으로 압사당한 김귀정 열사 그리고 군부독재에 자신의 몸을 불살라 싸우던 분신정국을 만들었던 수많은 열사들….
김총리는 조사에서 “오늘의 영결식은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이자, 새로운 역사, 진실의 역사, 화해와 통합의 역사로 가는 성찰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해자인 노씨는 생전에 용서를 구한 적이 없는데 화해와 통합을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노태우 씨는 <노태우 회고록>에서 5.18을 광주시민들이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계엄군에 맞선 것이라고 왜곡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노태우 회고록 이후에도 사죄의 뜻을 한마디도 밝힌 적이 없다. 노씨 사후에 그의 아들이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518 광주학살과 관련해 용서의 뜻을 비친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이 전부다. 이것이 어찌 사죄인가. 어떻게 타인(아들)이 대신하는 용서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도 해석을 통해 용서를 용서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이는 노태우 국가장을 위한 정치적 세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 <밀양>에서 나오듯 피해자가 용서한 적 없는데 가해자가 스스로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마음의 고요를 찾았던 범죄자의 모습 그대로다. 노태우의 유가족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자, 문재인 정부가 국가장을 치르는 명분을 만들고자 ‘억지로 명명된 용서’를 용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김총리의 조사는 피해자들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화해와 통합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동화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국가장법 2조에 의하면 전직대통령이라고 무조건 의무적으로 국가장을 치르도록 쓰여 있지는 않다. 대통령이 결정해야 가능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의 국가장 결정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얻고자 한 것이라는 평가를 벗기 힘든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장례가 치러지는 5일 동안 518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이 입었을 상처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국가폭력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무릇 정치라면, 정의를 좇아야 하고, 가해자의 편이 아닌 피해자의 곁에 서야 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권력에게 가까운 정치인들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동화되곤 한다. 가해자에게 동화된 정치인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가해자들이 대부분 권력을 기반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시>의 주인공 같은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성폭력 가해자인 손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것처럼, 존엄과 화해는 정의와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없이는 불가능하다. 처벌과 정의 없는 화해는 존엄하지도 않으며 위선이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이다. 정치인에게 ‘정치적으로 계산된 위선적인 화해’가 아니라 ‘존엄한 화해’를 원하는 건 순진한 일일까?
그래도 나는 꿈꾼다. 누군가는 존엄한 시를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피해자와 손잡고 싸우는 모습을, 그래서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고 피해자의 고통을 위로하는 사회를.
(명숙 활동가)
바람 소식지10호 - 2021년 10월
> 활동가의 편지
나는 존엄한 화해를 원한다
가해자에게 동화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10월 마지막 한주를 잠을 못자면서 보냈다. 도저히 화가 나고 괴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1212군사쿠데타의 주범이자 518광주학살의 핵심책임자였던 노태우 씨를 국가장을 치르겠다고 결정해서다. 국가장은 장례를 국민의 세금으로 치를 뿐 아니라 조기를 달고 대통령이 상주로 있으면서 공식적인 애도를 하는 것이다. 국가장 결정으로 피해자들은 국가장이 열리는 내내 노태우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슬퍼하고 그의 공을 치하하는 행사를 접해야 했다. 518학살 피해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자들은 얼마나 잠 못 이뤘을까. 얼마나 한스럽고 억울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은 부끄럽게도 학살자를 추모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추가했다.
노씨는 1979년 12월 12일 하나회 멤버로서 전두환 씨와 함께 탱크를 몰고 청와대를 들어가 군사쿠데타로 헌법을 유린한 사람이다. 충분하지 않지만 쿠데타에 대해서는 벌을 받았다. 처벌받았다고 국가장이라는 예우를 받을 대상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는 80년 광주학살 당시 수도경비 사령관으로서 광주에 있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학살한 주요 책임자다. 실제 노씨는 광주학살을 위해 서울에 있던 보병20사단을 광주로 내려가라며 지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권력서열 1위(전두환)가 아닌 2위라고 학살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독일 나치 전범 중 재판 받는 사람 중에는 권력서열 1위만이 아니라 비서관이나 강제수용소 경비도 있다. 너무나 대조적이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다르다는 논리는 비상식적이고 반인권적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전쟁범죄자 같은 중대한 국가범죄자들이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는 문제(불처벌)와 싸우며 세운 인권원칙이 있다. 국가정 결정은 이와 거리가 멀다. 유엔인권위의 논의를 시작으로 91년 <인권침해 가해자 불처벌에 대한 저지투쟁을 통한 인권보호 원칙>이 만들어졌고, 96년 유엔인권특별보고관은 인권소위원회와 유엔 총회에 제출한 <인권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불처벌 문제>라는 제목의 최종 보고서에 담겼다. 중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대개 정치권력과 폭력, 재력을 독점하고 처벌을 피하고 있다며, 불처벌이 생명권 침해의 주원인이며 생명권 침해를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2005년 피해자의 권리에도 반영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왜 피해자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노력하지 않는가.
피해자가 아닌 국가가 학살자에게 ‘용서와 화해’라는 면죄부를 줄 수 있는가
김부겸 총리는 10월 30일 장례식에서 노태우 씨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88올림픽 개최나 토지공개념 같은 공적이 있다는 조사를 낭독했다. 나는 묻고 싶다. 어떤 살인자가 그가 세운 공 때문에 치하받는 경우가 있는지. 사실 88올림픽 개최는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 시대 시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산업)의 연장선이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이 산업자유화의 흐름에서 세운 정책이므로 특별히 치하할 것이 못 된다. 더 큰 문제는 88올림픽 개최를 핑계로 빈민들을 쫓아낸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김총리는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88올림픽 개최의 이면은 애써 감췄다. 80년대 군부정부는 많은 재정을 3S 부흥에 힘을 들였을 뿐 아니라 부당한 정권 획득으로 인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치적 쌓기용‘ 정책도 많이 세웠다. 국제인권규약에 많이 비준한 때도 90년대다.
나는 기억한다. 수많은 빈민들의 절규와 투쟁을. 그리고 또 나는 기억한다. 노태우의 대통령 재임기간 죽어간 수많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열사들도. 91년 전경들에게 맞아 죽은 강경대 열사, 전경들의 강제진압으로 압사당한 김귀정 열사 그리고 군부독재에 자신의 몸을 불살라 싸우던 분신정국을 만들었던 수많은 열사들….
김총리는 조사에서 “오늘의 영결식은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이자, 새로운 역사, 진실의 역사, 화해와 통합의 역사로 가는 성찰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해자인 노씨는 생전에 용서를 구한 적이 없는데 화해와 통합을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노태우 씨는 <노태우 회고록>에서 5.18을 광주시민들이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계엄군에 맞선 것이라고 왜곡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노태우 회고록 이후에도 사죄의 뜻을 한마디도 밝힌 적이 없다. 노씨 사후에 그의 아들이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518 광주학살과 관련해 용서의 뜻을 비친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이 전부다. 이것이 어찌 사죄인가. 어떻게 타인(아들)이 대신하는 용서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도 해석을 통해 용서를 용서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이는 노태우 국가장을 위한 정치적 세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 <밀양>에서 나오듯 피해자가 용서한 적 없는데 가해자가 스스로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마음의 고요를 찾았던 범죄자의 모습 그대로다. 노태우의 유가족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자, 문재인 정부가 국가장을 치르는 명분을 만들고자 ‘억지로 명명된 용서’를 용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김총리의 조사는 피해자들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화해와 통합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동화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국가장법 2조에 의하면 전직대통령이라고 무조건 의무적으로 국가장을 치르도록 쓰여 있지는 않다. 대통령이 결정해야 가능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의 국가장 결정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얻고자 한 것이라는 평가를 벗기 힘든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장례가 치러지는 5일 동안 518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이 입었을 상처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국가폭력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무릇 정치라면, 정의를 좇아야 하고, 가해자의 편이 아닌 피해자의 곁에 서야 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권력에게 가까운 정치인들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동화되곤 한다. 가해자에게 동화된 정치인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가해자들이 대부분 권력을 기반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시>의 주인공 같은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성폭력 가해자인 손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것처럼, 존엄과 화해는 정의와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없이는 불가능하다. 처벌과 정의 없는 화해는 존엄하지도 않으며 위선이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이다. 정치인에게 ‘정치적으로 계산된 위선적인 화해’가 아니라 ‘존엄한 화해’를 원하는 건 순진한 일일까?
그래도 나는 꿈꾼다. 누군가는 존엄한 시를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피해자와 손잡고 싸우는 모습을, 그래서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고 피해자의 고통을 위로하는 사회를.
(명숙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