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5호] 살랑살랑 '후원인의 바람' : 김미숙

소식지 5호 - 2021년 3월

살랑살랑 ‘후원인의 바람’

유족들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면 좋겠어요!

- 김미숙 님 인터뷰(정리: 명숙)


인권운동네크워크 바람(약칭 인권운동 바람)의 후원인인 김미숙 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지난 1월 8일 제정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촉구를 위해 29일간 단식 후 복식을 막 끝내고 활동을 재개하고 있답니다. 유족에 대한 편견, 여성노동자의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에 대해 짧은 대화 속에 인권운동 바람이 할 일을 고민해보았습니다.

1월 8일 단식을 끝내고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지금 단식 끝나고 보식한지 두 달이 지났어요. 아직까지 몸 상태가 다 돌아온 게 아니어서 맵고 짠 음식은 조심하고 있어요. 속도 그런 걸 싫어하더라구요. 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자제하고 있어요. 원래 채식을 좋아하기도 해서 힘들지는 않아요,

3월 1일부터 재단에 다시 출근하면서 슬슬 기지개를 펴고 있어요. 4월이 노동안전의 달이라 지방마다 행사가 있어서 강의요청 등이 많거든요. 오늘도 경기도에 교육을 갔다 왔어요. 제가 전문지식인은 아니라서 노동안전에 대한 전문적 지식보다는 제가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이질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내용으로 해요. 부모로서 저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요.


단식 농성을 바라보는 주변 반응은 어떠했나요?

저도 제가 단식을 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해를 넘기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안 될 것 같고, 누군가는 앞당기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저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절박하지 않으면 통과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식하는 동안 시댁에서 텔레비전에 자꾸 나오니까 전화가 왔나 봐요. 언론에서도 좋게 비쳐지는 것 같아서 흐뭇해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하는 일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보니까 시댁 쪽에서도 좋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한명이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2018년 용균이 투쟁을 하면서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여파가 커졌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이런 결과를 냈다고 생각해요.


거리에서 김미숙 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떠세요?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어떤 사람이 “용균이 어머니 아니세요?” 그러면서 울면서 말 걸어왔을 때 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분과 같은 감정도 아닌데 그러니까 매우 당황스러웠어요. 처음 보는 분이 나나 용균이를 얼마나 아는지도 모르는데 안타까움의 깊이도 모르니까 어색했어요. 지금은 좀 익숙해져서 함께 마음 아파하고 손잡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있어요.


예전에 바람 활동가에게 유가족이라고 너무 슬프게 보지 말아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저로 인해서 누가 아파하는 게 달갑지는 않았던 것도 있어요. 나 혼자만 아픈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저를 볼 때마다 아파만 하면 저를 보는 게 힘들 거잖아요. 저도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유족을 너무 슬프게만 보지 말아달라고 할 때도 있어요. 저한테는 죽음 당시의 아픔도 있지만 용균이와 있을 때 좋았던 기억도 있는 거니까, 용균이에 대해서 꽃같이 행복했던 기억도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냥 사람들이 다양한 용균이를 접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와요. 유족들도 웃을 수 있다는 말이요. 우리 사회는 매일 유족은 힘들다고만 생각하는 건 아닐지. 사람이 어떻게 맨 날 울고 살기만 하겠어요. 대부분 슬픔에 잠겨 있으니 한번은 웃는 게 꼭 필요한 거잖아요. 세상을 보는 시각도 유족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김미숙님이 2018년 김용균투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어서 감동을 주는 면도 있는 거 같아요. 진상규명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잖아요.

제가 김용균재단 대표를 하게 된 거는 흔들림 없이 애초 세운 목표대로 끌고 가길 원해서였어요. 용균이 이름을 내건 만큼 용균이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할 거예요. 이렇게라도 자식을 기억하고 미안한 마음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요.


올해 계획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산업안전보건법 관련한 양형기준이 낮아서 어떻게 형량을 높일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반쪽이라고 하는데,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무슨 활동을 해야 할까도 고민하고 있어요. 사실 이번에 5인 미만 사업장 적용제외가 된 만큼 5인 미만 사업장 산재에 대해 더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권운동 바람은 페미니즘에 기반 한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인데요, 김미숙 님도 오랜 시간 여성노동자로서 일을 했잖아요. 그때의 경험을 조그만 말해주신다면?

결혼 전부터 일을 했고 아이 낳고도 했으니 20-30년 정도 일을 했어요. 비정규직이었지만 정규직 사원하고 임금은 같았어요, 하지만 해고 위험은 있었어요. 다른 부서에서 집단해고당하는 걸 보고 비정규직의 어려움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다음으로 해고되는 사람은 바른말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비정규직이 나쁜 건 고용불안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용균이 사건을 겪으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지요. 반값의 노무비, 열악한 노동환경, 아무리 시정요구해도 들어주지 않는 원청 등 이런 문제는 용균이 때문에 알게 됐어요.

저는 방진복 입고 컴퓨터 작업만 오랫동안 앉아서 일해서 허리디스크가 있었어요. 7년차인가에 시술받았는데 직업병인지는 몰랐어요. 산재에 대해 모를 때라, 그냥 내가 운동을 게을리 해서 그런 걸로 알았어요. 일반 사람들도 산재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 관심도 크게 없고 회사에 산재를 말하면 싫어할 것 같고 나라에서는 알려주지 않으니까요.

여성노동자 관련해서는 남자들은 가장이라고 돈을 더 주는 관행은 없었으면 해요. 실제 여자들이 가장인 곳이 얼마나 많아요. 임금격차가 없었으면 해요. 제가 처음 사회생활 할 때니 사회인식이 남아선호사상이 있으니 임금격차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세상이 다르잖아요.


인권운동 바람을 후원하게 된 계기는?

용균이투쟁 하면서부터 명숙 씨를 알게 됐고 단체 후원을 모으고 있길래 했어요. 인권단체에 제가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원이 가장 쉬운 거니까 후원했어요. 바람도 후원을 많이 받아서 활동영역도 넓히고 활동가도 늘리면 좋겠어요. 후원 모으는 게 쑥스럽지만 후원해달라고 적극 나서야 해요. 김용균재단도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일이 소중한 일이지만 일반사람들이 알아야 함께 할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짬을 내야 이런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손을 덜 들이고 활동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김용균재단의 활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유투브도 하고 있어요.


인권운동 바람에게 제안하고픈 일이 있다면?

저는 주로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해요. 언론을 대할 때나 인터뷰할 때도 좀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좀 더 바꾸는 노력을 하면 좋겠어요. 인권은 이런 거다 막연하게 말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인권이 녹아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인권은 부유층처럼 웬만큼 살기 좋은 사람들한테만 누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인권을 말하기 힘든 세상이잖아요. 서민이든 어느 계층이든 다 같이 누려야 하고 찾아야할 것이라는 걸 알리고 목소리를 내자고 힘주는 활동을 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