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17호] 활동가의 편지

['바람이 부는 현장, 움트림' 소식지 17호 2023.2월]

활동가의 편지

*올해부터 바뀐 바람 소식지<바람이 부는 현장, 움트림>의 이름은, 움('이갈리아 딸들'에서의 여성)/ 용틀임/ 움트다 세 단어를 조합한 것으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용의 기세로 평등한 세상의 싹을 움트게 한다는 뜻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퇴행의 파도에 일어서는 서퍼들이다

- 음, 저랑 밥 한 끼 하실래요?


안나(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들은 요즘 자주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사안이 변할 뿐 대상이 자주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누굴 말하는지 아시겠지요? 지난 주 세계여성의날 주간을 보내며 바람은 성명을 냈습니다. “거대한 퇴행의 파도도 우리를 삼킬 수는 없다! 젠더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싸움은 더 확장될 것이다!” 혐오와 차별, 탄압이 만연한 일상에서 이제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기울어진 게 아니라 뒤집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퇴행의 파도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뽑힌 지 이제야 1년이 되었고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는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믿기지 않습니다. 2023년만 하더라도 국가권력에 의한 크고 작은 퇴행 사실은 국가폭력의 사안들이 많았으니까요.


2021년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동의청원이 통과되고 국제인권기구의 권고가 있었음에도 국가보안법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총, 건설노조 등 국정원과 경찰의 압수수색과 구속으로 공안탄압 소식이 계속 들려옵니다. 정부가 아직까지도 사과 없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두고 식민제국주의의 역사를 뒤엎고 피해자를 무시하는 강제동원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시청 앞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가 있는데 사회적 주목은 적어지고 책임의 주체인 정부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언론을 통해 명분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저를 괴롭힌 이슈는 ‘출생률’입니다. 2022년 합계 출산율이 0.78명이라는 것에 언론은 저출생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달 말 저출생 종합대책이 발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저를 향한 말이 아니더라도). 결혼과 이성애 정상가족, 출산‧육아의 주체를 오로지 여성으로 한정하고, 여성에게 재생산 책임을 맡기는 말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하는 집회와 행진들에서 보고 들었듯이, 성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출산할 수 없습니다. 성별 임금 격차와 유리천장, 고용단절,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에서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을까요.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육아에 사회적 돌봄이 부재한 상황에서 어떻게 출산을 할 수 있을까요. 여가부를 폐지하고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만들겠다는 국가에서 여성의 몸을 인구정책 도구로 보는 국가에서 왜 임신을 해야 할까요. 성차별과 더불어 복지, 기후위기 등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이유를 101개는 나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때 비혼이 핫 키워드이면서 자유로운 이야기들이 풍성했는데, 금새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이 퍼지고 있습니다.


버티기의 시간

일주일만에 많은 사건들이 빠르게 생겨납니다. 뒤집힌 세상에서 사회적 분노와 걱정이 개인의 감정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무력감과 우울감이 있으신지 않은지 안부를 묻습니다. 한강을 지나는 지하철을 탈 때 가깝게 있는 다리나 자동차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멀리 있는 한강과 건물들은 천천히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듯이, 조금은 멀리 보고 버티기를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퇴행의 파도를 견디고 버텨서 결국에 일어서는 우리는 멋진 서퍼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뜬금없지만, 버티기의 시간에 힘을 보태줄 음식을 추천 드립니다(언젠가 이런 글을 써보고 싶었지요).

첫 번째 음식, ‘무조림’입니다. 제가 비건지향인으로 산지 3년이 넘었는데요. 비건지향을 하면서 채소 본연의 맛을 깨닫게 되었지요. 아무튼 저는 겨울만 되면 “겨울 무! 꼭 먹어야 해”를 외치면서 무 요리를 합니다. 겨울 무가 달기 때문이지요. 무나물무침, 뭇국, 무전, 그리고 무조림! 무조림은 특히 오래 조릴수록 무의 달큰한 맛이 우러나옵니다. 무를 다 건져 먹고 남은 양념에 밥을 슥슥 비벼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요. 그래서 오래 조릴수록 맛있는 무조림 먹으면서 지지치 않기!


두 번째 음식, ‘된장찌개’입니다. 어디선가 된장은 시간의 맛이라는 칼럼을 보았습니다. 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적절할 공기, 미생물에 의존하여 메주를 잘 띄우고 좋은 햇볕에 기대어 된장을 기다립니다. 된장을 오래 묵힐수록 감칠맛이 생기기도 하지요. 그렇게 발효와 숙성의 음식인 된장은 시간과 자연돌봄의 맛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투쟁하며 길을 만들었던 동지들의 시간을 기억하고 앞으로 함께 길을 만들 동지들을 봅시다. 동지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이끌어주기도 하면서 뚜벅뚜벅 함께 투쟁합시다. 그래서 된장찌개 먹으면서 메주의 시간, 발효의 시간을 함께 버틸 동지들을 떠올리기!


이렇게 ‘시간의 음식’을 추천! 지치고 힘든 때일수록 밥 잘 먹고 서로를 챙기면 좋겠습니다. 버티기의 시간, 모든 존재가 더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함께 버텨요! 그리고 저랑 밥 한 끼 하실래요?


*이번 활동가의 편지는 정말 편지처럼 적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무조림이나 된장찌개를 먹을 때 바람을 떠올리시면서 피식 한 번 웃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 밥 먹자는 연락으로 답을 해주신다면, 그 초대에 기쁘게 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