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3호 - 2020년 4월
코로나19가 드러낸 불평등의 민낯, 달라져야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벌써 봄입니다. 그런데 봄을 느끼는 사람들의 감각은 좀 늦었답니다. 예년보다 날씨가 따뜻했는데도 사람들은 춥게 느끼거나 옷을 두껍게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평소와 달리 옷차림이나 온도에 대한 감각이 달랐던 건 다름 아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감염증에 대한 공포와 불안,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주로 있던 탓에 봄이 와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벌써 한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 3개월이 넘었습니다. 전 세계 확진자가 70만 명이 넘고 사망자가 3만 명이 넘었습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물리적 거리두기를 권장하고 있어서 학교도 개학을 연기하고 재택근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확진환자가 9500명이 넘었고 사망자가 150명이 넘었습니다. 물리적 거리두기로 인해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휴업을 강요당하거나 해고를 당하기도 해 사람들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굶어서 죽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대구에서 긴급생계지원을 늑장으로 일관하는 대구시에 항의하며 시민 한명이 분신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괜한 불안과 공포는 아닙니다.
코로나19로 드러나 체제의 불평등
이번 코로나19가 많이 발생하거나 사망자가 발생 추이를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망자가 처음 발생했던 청도대남병원의 환자는 정신병동에 감금됐던 정신장애인(정신질환자)였습니다. 시설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그들의 면역을 떨어뜨렸겠지요. 지금도 전국의 곳곳 노인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이 죽어갑니다. 그 외 집단감염이 발생한 곳이 콜센터였습니다. 엄청난 노동강도와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감시체계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대리운전기사나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마스크만이 아니라 최저임금이나 고용지원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하고 수많은 노동인권단체가 요구했듯이 고용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그들을 고용하고 노동에 대해 지휘하는 사용자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업자라 불리며 최소한의 노동에 대한 인정이나 안전장치도 없습니다.
반면 미국의 부유층은 안전한 곳으로 휴양을 떠난다는 보도가 들립니다. 재난의 불평등은 체제의 민낯을 드러낼 뿐이었던 것이지요.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해야
따라서 코로나19를 극복한다는 것은 코로나19로 드러난 체제의 취약성, 불평등한 체제를 개선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백신만 개발한다고 끝나는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에게 몰아진 부와 재산, 의료, 안전 등을 사회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공공성을 파괴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해야 합니다.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던 비장애인 중심의 폭력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봄을 체감하듯이 코로나19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여야할 때가 아닐까요? 물리적 거리두기가 고립과 통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기에, 봄이 겨울을 이겨내는 생명의 씨앗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듯, 그래야 코로나19 이후에 달라진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소식지 3호 - 2020년 4월
코로나19가 드러낸 불평등의 민낯, 달라져야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벌써 봄입니다. 그런데 봄을 느끼는 사람들의 감각은 좀 늦었답니다. 예년보다 날씨가 따뜻했는데도 사람들은 춥게 느끼거나 옷을 두껍게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평소와 달리 옷차림이나 온도에 대한 감각이 달랐던 건 다름 아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감염증에 대한 공포와 불안,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주로 있던 탓에 봄이 와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벌써 한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 3개월이 넘었습니다. 전 세계 확진자가 70만 명이 넘고 사망자가 3만 명이 넘었습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물리적 거리두기를 권장하고 있어서 학교도 개학을 연기하고 재택근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확진환자가 9500명이 넘었고 사망자가 150명이 넘었습니다. 물리적 거리두기로 인해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휴업을 강요당하거나 해고를 당하기도 해 사람들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굶어서 죽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대구에서 긴급생계지원을 늑장으로 일관하는 대구시에 항의하며 시민 한명이 분신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괜한 불안과 공포는 아닙니다.
코로나19로 드러나 체제의 불평등
이번 코로나19가 많이 발생하거나 사망자가 발생 추이를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망자가 처음 발생했던 청도대남병원의 환자는 정신병동에 감금됐던 정신장애인(정신질환자)였습니다. 시설의 폐쇄성과 폭력성이 그들의 면역을 떨어뜨렸겠지요. 지금도 전국의 곳곳 노인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이 죽어갑니다. 그 외 집단감염이 발생한 곳이 콜센터였습니다. 엄청난 노동강도와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감시체계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대리운전기사나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마스크만이 아니라 최저임금이나 고용지원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하고 수많은 노동인권단체가 요구했듯이 고용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그들을 고용하고 노동에 대해 지휘하는 사용자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업자라 불리며 최소한의 노동에 대한 인정이나 안전장치도 없습니다.
반면 미국의 부유층은 안전한 곳으로 휴양을 떠난다는 보도가 들립니다. 재난의 불평등은 체제의 민낯을 드러낼 뿐이었던 것이지요.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해야
따라서 코로나19를 극복한다는 것은 코로나19로 드러난 체제의 취약성, 불평등한 체제를 개선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백신만 개발한다고 끝나는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에게 몰아진 부와 재산, 의료, 안전 등을 사회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공공성을 파괴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해야 합니다.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던 비장애인 중심의 폭력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봄을 체감하듯이 코로나19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여야할 때가 아닐까요? 물리적 거리두기가 고립과 통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기에, 봄이 겨울을 이겨내는 생명의 씨앗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듯, 그래야 코로나19 이후에 달라진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