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2호 - 2020년 1월
바람 자원활동가 '산들바람' 소식

‘산들바람’은 ‘시원하고 부드럽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인권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시원하고 부드러운 인권운동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하는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자원활동가 모임의 이름입니다.
● 바람 자원활동가 교육 후기
1. 자원활동가 서유진
집회시위 권리란, 집회 및 시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내가 기아자동차비정규직으로 2004년5월에 입사를해서 벌써 어느덧 2019년09월18일!
지금나는 서울고용노동청앞 농성장천막안. 우리 기아현대차비정규직6개지회는 지금 투쟁중이다. 천막을치고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장 김수억지회장은 단식을 시작한지 47일차에 호흡곤란 마비증세 두통증세 등등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오늘부로 15일차 단식농성중이다. 김수억지회장의 뒤를이어 집단단식중이다. 5키로 조금 넘게 빠졌다.
그 후로 시간이 한달이 넘게흐른 지금. .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늘 날짜는 2019년 10월 21일이다. 우리가 단식농성을 길게함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와 노동부에서 아무대책은 물론이거니와 반응조차도 없기에 9월27일 또한번의 집회와 행진을 하였다. 집회를하고 3일후인 9월 30일 기아자동차화성공장에 대한 불법파견에 대한 직접고용시정명령을 고용노동 부에서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1670명중에 간접공정을 제외한 직접공정부분만 인정한 860명만 시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법원에서는 차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모든 공정이 불법파견이라고 했다. 우리는 반쪽짜리 시정명령을 원한 것이 아니다.
10월 01일 !
우리는 남은 단식자, 나를 포함3명과 현대기아비정규직노동자20여명은 서울고용노동청2층에 있는 민원실에 올라갔다. 법원의 판결대로 제대로 시정명령을 내려달라고 노동부에 민원을 넣으러 간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는 우리 현대기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나가라고만 했고, 작년과 같이 또 다시 경찰을 동원하여 우리를 내쫓으려고만 하였다. 나중엔 내쫓지를 못하니 한쪽 화장실은 아예 자물쇠를 사서 걸어잠가버렸다. 화장실도 직원들과 경찰들이 열어줘야만 갈 수 있었고, 갔다올 때 본인들이 먼저 약속을 했다. 분명히 다시 꼭 들여 보내 주기로! 허나 노동청직원들과 경찰들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우리 노동자을 못들어오게 막았고, 우리를 자꾸 자극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노동청은 노동청이 아니었고, 경찰들은 경찰이 아니였다.
10월 02일. . 오전. . 우리는 공권력을 투입한 노동청에 의해 경찰들에게 서울고용노동청2층 민원실에서 끌려나왔고, 단식자들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단식29일차 임에도 경찰들은 막무가내로 끌어냈다. 다른 동지들은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우리는 존중받지 못했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법은 우리가 옳다고하는데 ! 왜 노동청이나 경찰이나 정부나 ! 말들은 더럽게도 잘들하면서 정작 노동자의편에서서 들어주지도 않는가 ?! 15년전! 10년전 ! 5년전 ! 현재도 ! 하나도 변한게없다.
기아자동차에 비정규직으로 입사를하고나서 참 많은 싸움과 투쟁들이 있었다. 구사대들의 폭력, 소방차동원 물대포, 용역깡패동원, 얼마전에는 하다못해 내가 15년을 일하던 자동차완성품검사라인에서도 쫓겨, 부품서열하는 곳인 물류사로 공장밖으로나오게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라인이 없어진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를 내쫓고 정규직들이 우리자리를 들어왔다. 다 사측의 꼼수다! 우리는 아직도 싸운다.
내가 노동조합활동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나라 정부와 행정기관들은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재벌을 비호한다. 국민들을위해서 일해야 할 기관들이 재벌의 수족이되어서 일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나라가 어딜봐서 노동존중의 세상이란 말인가?!
문재인이 대통령이되면 세상이 조금 바뀔 줄 알았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국민들은 힘들다고 살려달라하고 죽어가는데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자기들 주머니 불리기에만 급급하다.
나는 15년 넘게 기아자동차비정규직으로 다니면서 우리의 권리를 찾기위해서 그동안 지속적으로 많은 동지들과 함께 싸워왔다.
우리의 권리를 찾기위해서는 단체활동을 해야한다.단체활동을 하기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조합원들과 많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알게되었으면 한다. 그 노동조합을 움질일 수 있게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원천이 조합원들 이라는 것을 모두 알아야한다. 노동조합이 하고자하는 일들이 마음에 차지 않을지라도 싸워야 할때는 같이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도. . 그 다다음도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없으면 조합원은 없고, 조합원이 없으면 노동조합 또한 없다 !
내가 많이 해봤던 파업, 집회, 행진 등등 공장안에서 공장밖에서 싸웠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욕만 할 줄 알았던 내가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된 것이 꽤나 많다. 경찰대응방법, 집회시위할 때 지켜야할 것들! 다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말고도 생각보다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법도 알아야겠다는 생각도했다,
공부해야할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고쳐야할 부분들도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비정규직들을 위해 또, 힘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걸 나는 안다! 나의 선택이 옳다는거, 인권은 중요하고 우리의 권리는 소중하다는 것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이곳에서도 꼭 승리할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일들을 할것이라고 다짐했다.
2. 자원활동가 김현수
누구나 나의 인권,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지켜지길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인권도 지켜줄 의무가 있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인간으로서 어떤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지 몰라 스스로 나의 인권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권 교육이 의미 있었어요.
사람이 인류역사에 등장한지 오래인데, 고대, 중세 봉건 귀족 사회를 거쳐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 300년 전인 근대에 들어서야 인권에 대한 개념이 들어섰다는 게 놀라웠지요. 프랑스혁명 이후 점점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장애인들과 성소수자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 모두 사람인데 말이지요. 왜 누군가는 상대의 인권이 마치 자신에게 달려있는 양 타인에게 군림하고, 누군가는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 싸워야 할까요. 이 질문은 이미 누가 사람과 인권에 대한 이해가 없는지 답을 포함하고 있네요.
교육을 받으며 인권교육은 반드시 어릴때부터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고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이 기본적인 명제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시작할때부터 꼭 명심하고 지켜야 할 내용일테니깐요.
하지만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하물며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아니 성인이 되어도 어떻게 인권을 주장하고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나라에서 인권교육은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한편, 교육을 받으며 동양에서의 인권 형성, 발달 과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교육을 전해주신 인권네트워크 바람, 감사합니다!
3. 자원활동가 안나
내가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접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던 때는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저 돈이 없는 사람만 소수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회는 다변화되어사면서 차별도 다양해졌다. 인권교육을 통해서 소수자에 대한 정의를 알게 되었다. ‘사회적 소수자’란,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 사회 내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권력이나 자원이 적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억압체계는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어느 누구도 단일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상황 또는 맥락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특권적 위치인지 차별 받는 위치인지 가릴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일상적으로는 서울에 살고 비장애인이라는 특권을 갖고, 여자라는 차별 받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나는 여자로서 분리되어 있어야 했다. 명절에 시골을 가면 아빠들 앞에 놓여있는 예쁘게 담겨있는 음식보다는 엄마들과 함께 막 담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물론 참지 못하고 아빠들의 밥상에 후다닥 가서 앉아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그 경계가 애매해졌다. 사실 가족 안에서의 이러한 경계들은 도전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건 것은 교회에서 였다.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학생회장이 되기 어려웠고 여성스럽지 못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도 교회는 여전하다. 나는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판단받는다. 이것이 내가 겪은 그리고 겪고 있는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정체성은 청년이라는 정체성이다. 노인으로 보는 나이보다는 어려 특권인 것 같으면서도, 어떤 공간에서 쉽게 무시되는 것이 청년의 말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청년의 취업, 주거 등의 문제가 사회 문제사 되면서 청년 또한 마냥 특권 같지는 않다.
소수자는 구분짓기와 낙인, 편견 확산, 무관심 등으로 그 차별이 더욱 강화되고 사회에서 그들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직접 저항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그들은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을 쟁취하고 차별을 없애려했다. 소수자 인권보장을 위해서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시민사회의 노력과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제도 개선 등 이 필요하다. 여기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사자성을 넘는 ‘연대권’이다. 지난 해 12월 10일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님의 노동재해가 한국 사회에 큰 슬픔을 주었었다. 김용균 님을 추모하고 또 다른 김용균은 생겨나면 안된다며 모인 사람들은 “나는 너다. 나는 김용균이다”라고 외쳤다. 그의 죽음에서 원인이 되는 사회체제에 대해 분노하고 책임을 묻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추운 겨울에 광화문에 모여서 촛불을 들었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연대이며 공감이었다.
인상 깊게 남은 마틴 루터 킹의 말로 마무리하겠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나는 나의 정체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그 상황과 현장을 무시하지 않고 살 것이다.

소식지 2호 - 2020년 1월
바람 자원활동가 '산들바람' 소식
‘산들바람’은 ‘시원하고 부드럽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인권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시원하고 부드러운 인권운동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하는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자원활동가 모임의 이름입니다.
● 바람 자원활동가 교육 후기
1. 자원활동가 서유진
집회시위 권리란, 집회 및 시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내가 기아자동차비정규직으로 2004년5월에 입사를해서 벌써 어느덧 2019년09월18일!
지금나는 서울고용노동청앞 농성장천막안. 우리 기아현대차비정규직6개지회는 지금 투쟁중이다. 천막을치고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장 김수억지회장은 단식을 시작한지 47일차에 호흡곤란 마비증세 두통증세 등등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오늘부로 15일차 단식농성중이다. 김수억지회장의 뒤를이어 집단단식중이다. 5키로 조금 넘게 빠졌다.
그 후로 시간이 한달이 넘게흐른 지금. .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늘 날짜는 2019년 10월 21일이다. 우리가 단식농성을 길게함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와 노동부에서 아무대책은 물론이거니와 반응조차도 없기에 9월27일 또한번의 집회와 행진을 하였다. 집회를하고 3일후인 9월 30일 기아자동차화성공장에 대한 불법파견에 대한 직접고용시정명령을 고용노동 부에서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1670명중에 간접공정을 제외한 직접공정부분만 인정한 860명만 시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법원에서는 차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모든 공정이 불법파견이라고 했다. 우리는 반쪽짜리 시정명령을 원한 것이 아니다.
10월 01일 !
우리는 남은 단식자, 나를 포함3명과 현대기아비정규직노동자20여명은 서울고용노동청2층에 있는 민원실에 올라갔다. 법원의 판결대로 제대로 시정명령을 내려달라고 노동부에 민원을 넣으러 간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는 우리 현대기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나가라고만 했고, 작년과 같이 또 다시 경찰을 동원하여 우리를 내쫓으려고만 하였다. 나중엔 내쫓지를 못하니 한쪽 화장실은 아예 자물쇠를 사서 걸어잠가버렸다. 화장실도 직원들과 경찰들이 열어줘야만 갈 수 있었고, 갔다올 때 본인들이 먼저 약속을 했다. 분명히 다시 꼭 들여 보내 주기로! 허나 노동청직원들과 경찰들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우리 노동자을 못들어오게 막았고, 우리를 자꾸 자극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노동청은 노동청이 아니었고, 경찰들은 경찰이 아니였다.
10월 02일. . 오전. . 우리는 공권력을 투입한 노동청에 의해 경찰들에게 서울고용노동청2층 민원실에서 끌려나왔고, 단식자들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단식29일차 임에도 경찰들은 막무가내로 끌어냈다. 다른 동지들은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우리는 존중받지 못했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법은 우리가 옳다고하는데 ! 왜 노동청이나 경찰이나 정부나 ! 말들은 더럽게도 잘들하면서 정작 노동자의편에서서 들어주지도 않는가 ?! 15년전! 10년전 ! 5년전 ! 현재도 ! 하나도 변한게없다.
기아자동차에 비정규직으로 입사를하고나서 참 많은 싸움과 투쟁들이 있었다. 구사대들의 폭력, 소방차동원 물대포, 용역깡패동원, 얼마전에는 하다못해 내가 15년을 일하던 자동차완성품검사라인에서도 쫓겨, 부품서열하는 곳인 물류사로 공장밖으로나오게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라인이 없어진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를 내쫓고 정규직들이 우리자리를 들어왔다. 다 사측의 꼼수다! 우리는 아직도 싸운다.
내가 노동조합활동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나라 정부와 행정기관들은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재벌을 비호한다. 국민들을위해서 일해야 할 기관들이 재벌의 수족이되어서 일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나라가 어딜봐서 노동존중의 세상이란 말인가?!
문재인이 대통령이되면 세상이 조금 바뀔 줄 알았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국민들은 힘들다고 살려달라하고 죽어가는데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자기들 주머니 불리기에만 급급하다.
나는 15년 넘게 기아자동차비정규직으로 다니면서 우리의 권리를 찾기위해서 그동안 지속적으로 많은 동지들과 함께 싸워왔다.
우리의 권리를 찾기위해서는 단체활동을 해야한다.단체활동을 하기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조합원들과 많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알게되었으면 한다. 그 노동조합을 움질일 수 있게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원천이 조합원들 이라는 것을 모두 알아야한다. 노동조합이 하고자하는 일들이 마음에 차지 않을지라도 싸워야 할때는 같이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도. . 그 다다음도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없으면 조합원은 없고, 조합원이 없으면 노동조합 또한 없다 !
내가 많이 해봤던 파업, 집회, 행진 등등 공장안에서 공장밖에서 싸웠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욕만 할 줄 알았던 내가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된 것이 꽤나 많다. 경찰대응방법, 집회시위할 때 지켜야할 것들! 다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말고도 생각보다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법도 알아야겠다는 생각도했다,
공부해야할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고쳐야할 부분들도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비정규직들을 위해 또, 힘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걸 나는 안다! 나의 선택이 옳다는거, 인권은 중요하고 우리의 권리는 소중하다는 것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이곳에서도 꼭 승리할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일들을 할것이라고 다짐했다.
2. 자원활동가 김현수
누구나 나의 인권,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지켜지길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인권도 지켜줄 의무가 있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인간으로서 어떤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지 몰라 스스로 나의 인권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권 교육이 의미 있었어요.
사람이 인류역사에 등장한지 오래인데, 고대, 중세 봉건 귀족 사회를 거쳐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 300년 전인 근대에 들어서야 인권에 대한 개념이 들어섰다는 게 놀라웠지요. 프랑스혁명 이후 점점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장애인들과 성소수자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 모두 사람인데 말이지요. 왜 누군가는 상대의 인권이 마치 자신에게 달려있는 양 타인에게 군림하고, 누군가는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 싸워야 할까요. 이 질문은 이미 누가 사람과 인권에 대한 이해가 없는지 답을 포함하고 있네요.
교육을 받으며 인권교육은 반드시 어릴때부터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고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이 기본적인 명제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시작할때부터 꼭 명심하고 지켜야 할 내용일테니깐요.
하지만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하물며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아니 성인이 되어도 어떻게 인권을 주장하고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나라에서 인권교육은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한편, 교육을 받으며 동양에서의 인권 형성, 발달 과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교육을 전해주신 인권네트워크 바람, 감사합니다!
3. 자원활동가 안나
내가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접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던 때는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저 돈이 없는 사람만 소수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회는 다변화되어사면서 차별도 다양해졌다. 인권교육을 통해서 소수자에 대한 정의를 알게 되었다. ‘사회적 소수자’란,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 사회 내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권력이나 자원이 적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억압체계는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어느 누구도 단일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상황 또는 맥락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특권적 위치인지 차별 받는 위치인지 가릴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일상적으로는 서울에 살고 비장애인이라는 특권을 갖고, 여자라는 차별 받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나는 여자로서 분리되어 있어야 했다. 명절에 시골을 가면 아빠들 앞에 놓여있는 예쁘게 담겨있는 음식보다는 엄마들과 함께 막 담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물론 참지 못하고 아빠들의 밥상에 후다닥 가서 앉아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그 경계가 애매해졌다. 사실 가족 안에서의 이러한 경계들은 도전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건 것은 교회에서 였다.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학생회장이 되기 어려웠고 여성스럽지 못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도 교회는 여전하다. 나는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판단받는다. 이것이 내가 겪은 그리고 겪고 있는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정체성은 청년이라는 정체성이다. 노인으로 보는 나이보다는 어려 특권인 것 같으면서도, 어떤 공간에서 쉽게 무시되는 것이 청년의 말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청년의 취업, 주거 등의 문제가 사회 문제사 되면서 청년 또한 마냥 특권 같지는 않다.
소수자는 구분짓기와 낙인, 편견 확산, 무관심 등으로 그 차별이 더욱 강화되고 사회에서 그들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직접 저항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그들은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을 쟁취하고 차별을 없애려했다. 소수자 인권보장을 위해서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시민사회의 노력과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제도 개선 등 이 필요하다. 여기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사자성을 넘는 ‘연대권’이다. 지난 해 12월 10일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님의 노동재해가 한국 사회에 큰 슬픔을 주었었다. 김용균 님을 추모하고 또 다른 김용균은 생겨나면 안된다며 모인 사람들은 “나는 너다. 나는 김용균이다”라고 외쳤다. 그의 죽음에서 원인이 되는 사회체제에 대해 분노하고 책임을 묻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추운 겨울에 광화문에 모여서 촛불을 들었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연대이며 공감이었다.
인상 깊게 남은 마틴 루터 킹의 말로 마무리하겠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나는 나의 정체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그 상황과 현장을 무시하지 않고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