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임활동가의 편지]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광장에서 보다
혁명의 순간을 넓히고 있는 나날에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무색한 나날입니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래로 일상이 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비상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장악하려 했고, 국회를 지키려는 시민들 앞으로 탱크가 지나갔습니다. 최소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에 다시 군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는 일이 발생했다는게 아직도 믿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만큼 민주주의는 허약해졌다는 뜻이 아닐까요? 매일 아침 윤석열이 체포됐나, 뉴스 속보를 쳐다보던 일상, 혹시 극우세력이 무슨 일을 저질렀나 노심초사하던 날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미 그전에 징조는 있었습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면서, 여성관련 예산을 삭감하고 여성이란 이름이 들어간 부서를 없애면서 성차별을 강화하던 윤석열 정부, 급기야 성평등부서인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며 여혐 세력을 모을 때 그 속에 이미 독재의 징조가 들어있었습니다. 장애인들도 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장애인권리보장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라는 전장연의 시위를 ‘비문명시위’로 낙인 찍고 탄압할 때 극우정치는 드러났습니다. 나아가 성소수자차별과 이주민 혐오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최소한의 법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거부하던 윤석열 이전의 정부에서부터 혐오는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혐오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 극우정치는 자라납니다. 극우정치는 윤석열만 키운 것이 아닙니다. 자본의 무한 이윤을 위해 공공성을 줄여가는 자본주의 정치는 혐오로 내부를 갈라쳐 자본의 위기로 인한 불안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최근 10년간의 정치가 성평등 없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함에도 성평등이 삶의 불안을 키웠다면서 페미니스트를 공격하도록 방치한 결과가 여성혐오세력에 힘을 몰아주어 여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그 역사가 쌓여 극우세력들이 윤석열의 말 한마디에 헌법적 구제기관인 서부지방법원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정점이 윤석열 정권의 위헌적 비상계엄인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희망을 꿈꿉니다. 우리는 맨몸으로 탱크를 막고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비상계엄을 해제하도록 싸웠다는 사실에서 희망의 빛을 봅니다.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 세력의 처벌을 위해 날마다 광장에 나와 외치고 있습니다. 특히 2030 페미니스트들이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이후에 우리가 다시 만들 세상은 성평등한 세상이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이번 사태를 통해 확실해진 것은 성평등과 존엄의 가치를 담은 정치와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절실하게 경험했으니까요.
또한 윤석열 퇴진광장에서 보여준 사람들의 굽힘없는 지키기, 낯선 사람들에 대한 환대, 싸우고 저항하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연대는 다른 체제와 다른 사회관계를 꿈꾸기에 충분했습니다. <폭풍 다음에 희망;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의 저자 존 홀러웨이가 말했듯이, “희망의 물질적 기반은 자본의 논리에 ‘아니요’라고 외치는 전 세계의 운동들, 다른 사회관계를 창조하기 위해 자본주의 속에서-대항하며-넘어서 나아가는 운동들”입니다. 경쟁 속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 치부된 사람들이 서로 추울까 배고플까 자신이 챙겨온 간식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며, 서울교통공사 직원과 경찰들에게 사지가 들려 나가는 장애인들의 지하철행동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자들이 약속을 지키라며 을지로 한화오션 본사 앞에서 농성천막 하나 못치고 폭력에 시달릴 때 그 밤에 달려오신 분들, 농민들의 행진이 가로막혀 도로에 앉아 싸울 때 그렇게 시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몰려왔을 때 보인 연결의 힘에서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분명 개인의 안위와 생존만을 지키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요.
윤석열과 그 일당들에 저항하며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조금씩 서로에게 배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광장의 나날들이 혁명의 순간이 아닐까, 감히 말해봅니다. 너와 나를 나누지 않고 모두의 존엄을 지키려는 저항의 순간에서 희망의 씨앗, 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만들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마도 매주 열리는 여러 저항의 광장에 가는 일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풍성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2월에도, 3월에도 우리 이렇게 저항과 연대의 광장에서 희망을 쌓고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가면 좋겠습니다. 이제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광장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봅시다. 바람도, 저도 그 길에 함께 하겠습니다.

[상임활동가의 편지]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광장에서 보다
혁명의 순간을 넓히고 있는 나날에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무색한 나날입니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래로 일상이 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비상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장악하려 했고, 국회를 지키려는 시민들 앞으로 탱크가 지나갔습니다. 최소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에 다시 군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는 일이 발생했다는게 아직도 믿겨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만큼 민주주의는 허약해졌다는 뜻이 아닐까요? 매일 아침 윤석열이 체포됐나, 뉴스 속보를 쳐다보던 일상, 혹시 극우세력이 무슨 일을 저질렀나 노심초사하던 날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미 그전에 징조는 있었습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면서, 여성관련 예산을 삭감하고 여성이란 이름이 들어간 부서를 없애면서 성차별을 강화하던 윤석열 정부, 급기야 성평등부서인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며 여혐 세력을 모을 때 그 속에 이미 독재의 징조가 들어있었습니다. 장애인들도 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장애인권리보장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라는 전장연의 시위를 ‘비문명시위’로 낙인 찍고 탄압할 때 극우정치는 드러났습니다. 나아가 성소수자차별과 이주민 혐오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최소한의 법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거부하던 윤석열 이전의 정부에서부터 혐오는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혐오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 극우정치는 자라납니다. 극우정치는 윤석열만 키운 것이 아닙니다. 자본의 무한 이윤을 위해 공공성을 줄여가는 자본주의 정치는 혐오로 내부를 갈라쳐 자본의 위기로 인한 불안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최근 10년간의 정치가 성평등 없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함에도 성평등이 삶의 불안을 키웠다면서 페미니스트를 공격하도록 방치한 결과가 여성혐오세력에 힘을 몰아주어 여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그 역사가 쌓여 극우세력들이 윤석열의 말 한마디에 헌법적 구제기관인 서부지방법원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정점이 윤석열 정권의 위헌적 비상계엄인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희망을 꿈꿉니다. 우리는 맨몸으로 탱크를 막고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비상계엄을 해제하도록 싸웠다는 사실에서 희망의 빛을 봅니다.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 세력의 처벌을 위해 날마다 광장에 나와 외치고 있습니다. 특히 2030 페미니스트들이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이후에 우리가 다시 만들 세상은 성평등한 세상이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이번 사태를 통해 확실해진 것은 성평등과 존엄의 가치를 담은 정치와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절실하게 경험했으니까요.
또한 윤석열 퇴진광장에서 보여준 사람들의 굽힘없는 지키기, 낯선 사람들에 대한 환대, 싸우고 저항하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연대는 다른 체제와 다른 사회관계를 꿈꾸기에 충분했습니다. <폭풍 다음에 희망;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의 저자 존 홀러웨이가 말했듯이, “희망의 물질적 기반은 자본의 논리에 ‘아니요’라고 외치는 전 세계의 운동들, 다른 사회관계를 창조하기 위해 자본주의 속에서-대항하며-넘어서 나아가는 운동들”입니다. 경쟁 속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 치부된 사람들이 서로 추울까 배고플까 자신이 챙겨온 간식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며, 서울교통공사 직원과 경찰들에게 사지가 들려 나가는 장애인들의 지하철행동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자들이 약속을 지키라며 을지로 한화오션 본사 앞에서 농성천막 하나 못치고 폭력에 시달릴 때 그 밤에 달려오신 분들, 농민들의 행진이 가로막혀 도로에 앉아 싸울 때 그렇게 시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몰려왔을 때 보인 연결의 힘에서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분명 개인의 안위와 생존만을 지키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요.
윤석열과 그 일당들에 저항하며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조금씩 서로에게 배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광장의 나날들이 혁명의 순간이 아닐까, 감히 말해봅니다. 너와 나를 나누지 않고 모두의 존엄을 지키려는 저항의 순간에서 희망의 씨앗, 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만들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마도 매주 열리는 여러 저항의 광장에 가는 일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풍성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2월에도, 3월에도 우리 이렇게 저항과 연대의 광장에서 희망을 쌓고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가면 좋겠습니다. 이제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광장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봅시다. 바람도, 저도 그 길에 함께 하겠습니다.